전락(轉落)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알베르 카뮈가 1956년에 출간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특이한 서술 형식을 취하고있는데 일인칭인 주인공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멕시코시티'라는 이름의 선술집에서 만난 여행객과 닷새 동안 주고 받는 장황한 대화를 서술한 것으로 특이하게도 상대방의 말은 서술되지 않아서 일인칭의 주인공인 장-바티스트 클라망스의 말에 의해서나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대화인지 독백인지도 의심스러운 자기 고백이 요설처럼 전개되는데 바다보다 육지가 낮은 인공의 도시 암스테르담의 바다와 운하에 둘러싸인 특별한 배경 속에서, 주인공이 프랑스의 파리에서 유능한 변호사로 일하고 있을 때 11월에 자정이 넘어 한 시쯤에 센강의 한 다리에서 여자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다가 젊은 여자가 투신자살하는 것을 목격한 이후로 그녀를 구해 주지 못한 것을 자책하여 그 이후로 직업 외에도 사람들에게 온갖 선행을 베풀었었던 자신의 행적이 위선이었다고 생각하여 실의에 젖어 있다가 변호사를 그만 두고 여행 끝에 암스테르담에 정착하여 낯선 여행객들과 대화를 나누며 지내게 되는 심경의 변화 과정이 섬세하게 서술돼 있다.

  단순명료한 줄거리의 카뮈의 다른 소설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주인공의 의식의 변화 과정을 치밀 하게 묘사하면서 상징의 수법을 많이 살린 난해한 작품이다.

  결국 이 소설은 한 여인의 자살 현장에서 그녀를 구해 주지 못한 주인공이 죄책감의 가중과 자기만족감의 상실을 통해서 서서히 전락해 가는 과정을 스스로의 입을 통해 묘사하면서 윤리 의식과 인도주의 정신을 독자들에게 강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읽었었지만 그때는 클라망스의 일방적인 대화만이 서술돼 있는 특이한 분위기의 소설이라는 인상만 강하게 뇌리에 각인돼었지, 화자( 話 者)가 왜 이렇게 장황한 요설을 펼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기 때문에 작품을 아예 새로 읽는 기분으로 접하게 됐다.

  부유하면서도 호색적이기도 한 범속한 생활에 젖어 살면서도 자신보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선에도 인색하지 않아 스스로를 이타적이고 헌신적이라고 자부하며 살던 한 유능하고 돈도 많이 버는 변호사가 어느날 센강의 다리에서 투신자살하는 여인을 구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해 한참 잊고 있다가 센강의 다른 다리에서 저녁때 호젓하게 걷고 있을 때 보이지 않는 여인의 웃음소리를 듣게 된 이후로 다시 뇌리에 자꾸 잊혀졌었던 자살 사건을 떠올리게 되어 죄책감에 사로잡혀 서서히 전락해 간다는 것은 읽는 이를 그로테스크한 전율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하다.

  결국 주인공은 자신의 섬세한 내면세계를 암스테르담의 한 선술집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들려줌으로써 자신의 죄의식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이방인'의 '뫼르소'와는 대조적일 정도의 성격을 가진 클라망스라는, 사회적 지위와 명망이 높고 지극히 양심적인 인물이 자신의 조그만 악덕이나 부도덕도 스스로 세심하고 준렬하게 꾸짖으며 그야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을 보여 주 고 있다.

  지위가 높을수록 도덕에 둔감하고 법에도 초연한, 후진국적인 행태를 보여주는 한국의 상류층들이 배워야 할, 의식의 한 귀퉁이에라도 자리잡게 해야 할 덕목이 아닌가.

  지나칠 정도로 자신의 내면에 울리는 양심의 소리에 민감한 클라망스라는 허구의 존재는 현대판 예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자신의 잇속 채우기에만 급급하고 이기적이며 사회에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끼치면서도 성찰은 커녕 오히려 가학적, 변태적 쾌감까지 느끼면서 법망을 교묘히 빠져 나와 사회적 제재를 받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은 지식인과 중상류 계층의 양심을 찌르며 강렬하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약자에게 베푸는 용서가 관용이고 강자에게 베푸는 용서는 굴종일 뿐일 것이다.

  타인에게 엄격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엄격하여 지식이 폭력과 파시즘이 되지 않고 만인을 위하는 이로운 힘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 게 지식인의 사회적, 도덕적 책무이자 본령( 本 領)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