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st Of Us' Side Story - 빌이 기억하는 부랑자

이 이야기는 습작을 위해서 쓰여졌으며 이야기의 초반부는 “북한군에는 반생이가 있다.” 라는 글의 많은 부분을 인용했습니다.

'The Last Of Us' Side Story - 빌이 기억하는 부랑자

2019년 1월 27일

그날은 감염자들의 대습격이 있기 한달 전쯤의 어느 날이었다.

메사추세츠 서쪽의 우스터 격리구역으로부터 프레이밍햄 격리구역에 지프를 타고 급하게 달려온 군인 출신의 사내는 믿기 힘든 정보를 건네왔다.

며칠 전 우스터에 들어온 한 부랑자가 지하조직인 FAS를 거의 괴멸시키고 소총과 탄약 수백 발을 탈취하여 동쪽으로 도망갔다는 것이다.

덕분에 그 동선 상에 가장 가까운 프레이밍햄 격리구역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당시는 구역 내 감염자의 발생도 가뭄에 콩 나듯 거의 없을 때였고, 이런 때에 바로 옆의 격리구역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주민들에게 큰 불안을 가져왔다.

거기에다 흉악하기로 유명한 FAS 의 조직원들을 수십 명 살해하고 무기까지 휴대한 채 도주 중이라는 것은 차라리 악몽에 가까웠다.

당시 프레이밍햄 격리구역은 주민이 수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때문에 이를 관리하는 군인들도 몇 되지 않아 건장한 주민들 중 일부가 부족한 경계를 채우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 막 다시 삶을 살아가려는 주민들에게는 부족하지만 안식을 주는 장소였기 때문에 선출된 자경단의 리더들은 모든 요해 통행로를 차단한 후 눈에 불을 밝히고 경계와 수색을 했다.

프레이밍햄을 지나치면 바로 보스턴 격리구역으로 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스턴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근처의 감염자 소거를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부족한 물자와 점점 흉폭하고 강력하게 변해가는 감염자들의 확대는 그런 노력을 거의 수포로 만들었고, 그나마 성공한 것이 지금의 프레이밍햄 격리구역이었다.

따라서 프레이밍햄의 주변으로 보스턴으로 향하는 길은 대부분 최근 부쩍 많아진 클리커들의 소굴이었다.

인간 혼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인 것이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부랑자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사실 부랑자는 프레이밍햄을 통과하는 것을 포기하고 북쪽의 로웰까지 올라가 보스턴으로 내려가기 위해 북상했다.

하지만 말버러에서 클리커들의 소굴에 둘러 쌓여 옴짝달싹을 못하고 있었다.

탄약은 잔뜩 들고 나왔지만 정작 식량은 챙기지 못했던 부랑자는 결국 3km나 되는 거리를 기어가다시피 빠져 나와 과거 주택자재 전문매장이었던 더홈디포에 도달했다.

이곳은 프레이밍햄의 정찰기지 중 하나였고 동양인 노인 한 명이 상시 상주하고 있었다.

노인은 매장 안으로 들어온 자가 소문의 그 부랑자라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그를 당해내는 것이 쉽지 않을 테니 절대 내색하지 않고 음식을 제공했다.

부랑자가 음식을 먹고 피곤에 골아 떨어지자 노인은 조용히 매장을 빠져 나와 프레이밍햄으로 달아났다. 

달린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프레이밍햄의 자경단 순찰대를 만나 노인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곧 매장으로 순찰대가 들이닥쳤지만 이미 그 부랑자는 매장에 있지 않았다.

그리고나서 다시 그 부랑자의 행적은 가뭇없이 찾을 수가 없었다.

너무 신출귀몰하기에 아무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고 자경단의 리더들은 이제 그가 메사추세츠에서 떠났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빌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고 그날은 형식적으로 서드베리로 향하는 도로를 순찰하는 흉내만 내고 있었다.

프레이밍햄에서 북쪽의 애니멀 병원을 지나는 에드젤 로드와 노브스콧 로드를 지나 나오는 유니온 에비뉴는 서드베리로 통하는 길 중 유일하게 어느 정도 감염자 소거가 이루어진 길이었다.

하지만 자주 다니는 길은 아니었기 때문에 감염자들은 금새 다시 채워지곤 했다.

빌은 겨우겨우 굴러가는 지프 2대에 5명의 자경대원을 이끌고 그 길을 따라 북상하던 중이었다.

홉 브록 하천을 지나면 그나마 드문드문 보이던 주택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숲이 잠깐 이어진다.

가장 위험한 곳이었기 때문에 빌은 긴장한 상태로 지프 안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별일 없었지만 콩코드 로드로 합류하는 지점까지 온 빌은 문득 차를 멈췄다.

"방금 지난 온 곳에 있던 파란색 지붕 집 좀 이상하지 않았어?"

예전에 자경대원 중 하나인 테일러가 들어갔다가 죽은 곳이라서 대원들이 일명 테일러 하우스 라고 부르는 집이었다.

동료가 죽었던 집이어서 인지 그 후로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고 덕분에 가끔 감염자들이 떠돌다 들어가 스스로 갇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지프처럼 큰 소리를 내며 그 앞을 지나가면 갇혀있는 감염자들의 괴성이 항상 동반되었던 곳이었다.

빌은 오늘따라 조용했던 그 집이 왠지 수상했던 것이다.

지프를 멀찌감치 세워두고 빌을 비롯한 자경대원들을 조용히 테일러 하우스로 다가갔다.

집 근처에 다 와서 대원 한 명이 죽어있는 감염자를 발견했다.

아직까지 스토커나 클리커로 변이되지 않은 여성 러너였다. 특별한 상처가 없이 목 주위가 심하게 압박되었었고 그 흔적은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다.

빌은 자신의 예감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원들에게 좀 더 주위를 주고는 다시 집 쪽으로 향하던 순간이었다.

탕~!

빌의 발 앞에 총알이 박혔다.

그 소리에 모두가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 엎드렸고 빌은 그 상태 그대로 몸이 굳었다.

빌이 슬그머니 손을 올리려는 찰나에 피곤해 보이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 조금만 더 오면 이번엔 죽이겠다!"

빌은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는 쏘지 말라고 외쳤다. 부랑자의 말대로 더 다가가지는 않고 투항하라고 외치면서 대원들을 이리저리 포진시켰다.

"그냥 지나친다면 나 역시 조용히 사라지겠다."

부랑자 역시 재차 경고를 했다.

하지만 빌은 운 좋게 잡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부랑자를 생포해 간다면 추가 배급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좆같은 격리구역 밖에서 나만의 마을을 만들 준비를 할 자금이 채워질 것이다.

빌이 계속 뒤의 대원들을 조금씩 전진시키자 부랑자는 결국 다시 총을 발사했다. 이번에는 막 빌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려는 대원의 발 앞에 맞았다.

놀란 대원들의 몸이 다시 움츠러들었다.

빌이 큰 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총을 쏘지 말고 투항해!"

"사람을 또다시 죽이면 너도 살아남지 못해!"

하지만 부랑자는 이미 목숨을 내놓은 듯했다. 빌의 말에 대뜸 총을 놓고 투항할 리는 만무하고 상황은 계속 대치되었다.

기다리다 못한 빌이 한 발짝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또다시 총소리가 나더니 빌의 발 앞에 총알이 박혔다.

노련한 사격 솜씨에 대원들도 조금 주눅이 들었다. 빌이 대원들을 살펴보니 목숨을 걸고 무작정 집 안으로 들어갈 대원은 없어 보였다. 빌 자신을 포함해서.

"더 이상 들어오면 이번엔 누군가의 머리다. 난 이미 죽을 각오를 했고 미련도 없어. 나를 잡으려면 너희 중 절반은 죽어야 할 것이다."

부랑자는 잠시 숨을 고르고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다시 외쳤다.

"난 절대로 산 채로 너희들에게 잡히지 않을 거다. 특히 너희 같은 군인들에게는."

빌은 여전히 철수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이대로 공격해 들어가면 자신을 포함해서 여러 명이 희생될 것은 자명했다.

빌은 가장 어린 대원에게 손짓해서 지원부대를 부르도록 했다.

어린 대원은 기다시피 뒤로 나아가 지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힐끔 보고는 빌은 집을 향해 소리쳤다.

"이제 우리 대원들이 더 도착할 것이다. 그럼 당신의 탈출을 더욱 불가능해지겠지. 더이상 저항하지 말고 투항해라!"

"그리고... 우린 군인이 아니야. 그저 우리의 마을을 지키려는 자경대일 뿐이다."

그러자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집 안에서 부랑자가 말했다.

"군인이 아니라면 나도 당신들과 이렇게 싸우고 싶지 않아. 난 그저 여기를 지나가고 있을 뿐이야."

"내가 우스터에서 그 새끼들을 죽인 것은 죽을 이유가 있기 때문이야. 그 외에는 아무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지."

"그 매장에 있던 노인도 죽이지 않았어. 그냥 날 모른 척 해."

그러자 빌이 다시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난 이 지역을 지키는 사람 중 하나야. 그런 엄청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마을 근처를 떠돌게 놔둘 수는 없어."

"나도 FAS 놈들을 증오해. 내 뒤에 있는 대원들도 마찬가지이지. 우린 단지 당신의 신병을 구속해서 더 이상의 위험이 없는지 확인하려는 것뿐이다."

그러자 부랑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총을 놓고 투항하면 당신들에게 잡혀서 다시 우스터로 가게 될 터인데 내가 죽을 줄 뻔히 알면서 순순히 무기를 놓을 수 있겠나?"

"그러니 아무도 다치거나 죽는 사람 없이 서로 가던 길 가자고."

"날 공격하기 시작하면 적어도 6~7명을 죽을 각오를 해."

그렇게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팽팽한 기 싸움과 권고가 계속 되었지만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빌은 잠시 생각이 잠겼다가 다시 말했다.

"그럼 당신이 바라는 것은 무사히 다시 당신이 가던 길로 가는 것이지?"

"그렇다면 내가 보장하겠다. 총을 내려 놓고 투항한다면 우스터로 보내지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하겠어!"

...

잠자코 침묵이 흐르다가 부랑자가 반문하듯 물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날 정말 믿게 하려면 당신들이 물러서."

그러자 빌이 대답했다.

"당신에게는 지금 다른 선택이 없다. 우리 믿고 총을 내려놓던가, 아니면 총을 들고 싸우다 죽던가. 당신은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이지?"

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사실 부랑자는 이미 발에 부상을 당한 상태였고 시간 역시 그의 편이 아니었다.

부랑자는 다시 한번 약속을 확인하자 빌이 대답했다.

"주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당신을 우스터로 보내지 않겠다고 장담한다."

"우리 프레이밍햄은 보스턴 지구와는 형제 사이이지만 우스터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빌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있었다.

한참이나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망설이던 부랑자는 권고에 따르겠다고 대답하고는 두 손을 쳐들고 문으로 걸어 나왔다.

부랑자는 40대로 보이는 체격 건장한 남성이었다. 

그동안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는지 여기저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대원들이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소총과 총알을 압수한 후 두 손을 묶으려 했다.

빌은 묶지 말라고 말했다.

"스스로 걸어 나왔는데 뭐 하러 포박을 해?"

그리고는 자신이 탄 지프의 옆자리에 앉혀서 프레이밍햄 격리지구로 향했다.

긴장한 기색의 부랑자는 조금은 그 표정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프레이밍햄에 도착한 그들은 우선 부랑자를 수감했다.

빌은 곧바로 이것저것 음식과 술을 싸 들고 간이 감옥에 수감된 부랑자를 찾아갔다.

그를 지키는 대원까지 끌고 들어와 음식을 펼쳐놓고 술을 마셨다.

그동안 많이 굶었을 텐데 부랑자는 천천히 음식을 먹고는 빌이 따라주는 술을 그대로 목에 들이 부었다.

빌은 그 동안 궁금하던걸 물었다.

"그래, 그 쓰레기 같은 놈들은 왜 죽였던 거야? 아, FAS 놈들 말이야."

빌의 말에 덩달아 들어온 자경대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부랑자를 쳐다 보았다.

부랑자는 잠깐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난 원래 우스터로 오던 길이 아니었어. 뉴욕에서 프로비던스로 가던 중이었지."

"그런데 중간에 러너들의 습격을 받았어. 엄청난 수였지. 마치 짐승들이 대이동을 하듯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 중이었어."

"그놈들을 겨우 피하기는 했지만 다리를 다쳤지. 이제 죽었구나 싶었을 때 어떤 여자가 와서 날 구해줬어."

"우스터의 순찰대원이었어. 그녀는 날 치료해주었고 난 그녀를 따라 우스터로 가게 되었어. 그녀의 집에서 한동안 묵었지."

"그녀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무척 귀여운 아이였어. 날 보고 엄마의 남자친구냐고 물었었지."

빌이 이죽거렸다.

"크, 그 여자랑 잤군?"

피식거린 부랑자는 그 후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한숨을 한번 크게 쉬더니 이야기를 이었다.

"어느날 집으로 그 자식들이 찾아왔어. 알고 보니 그녀는 그 놈들에게 진 빚이 많더군. 여자 혼자서 어린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힘들 수 밖에 없는 일이겠지."

"그녀는 여느 때처럼 소란을 부리고는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날은 아니었어."

"나와 그녀를 묶어 바닥에 눕혀놓고는 그 앞에서 아이를 강간했어."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를 듣던 자경대원이 눈이 휘둥그래졌다.

빌은 놀라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는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그 아이가... 울부짖는 소리가... "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

빌과 대원은 감히 그 침묵을 깰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놈들은 모두 죽어있었고 그녀는 딸아이를 안고 오열하고 있었어."

"그놈들과 싸우다가 오발 하나가 그 아이를 뚫고 지나갔던 거야."

"살아남은 놈 하나가 창문 너머로 도망가는 것을 보았어. 그녀를 위로할 생각도 없이 쫓아갔지. 그리고..."

"..."

"모두 죽였어."

"그것뿐이야."

빌은 기가 막힌 듯 한숨을 내쉬었다.

FAS 의 조직원들이 전부 몰살 당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여자와 딸의 이야기는 듣지 못했었다.

프레이밍햄과 우스터는 비록 거리는 가까워도 큰 내왕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FAS 의 악행은 이곳에서도 유명했다.

밀수는 물론 마약에 어린 여자 아이들까지 성매매를 시키는 놈들이었다.

하지만 격리구역을 통제하는 군인들과 결탁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다.

온갖 더럽고 잔인한 짓을 해왔던 100명에 가까운 조직원이 고작 눈 앞에 있는 이 초라한 사내 한 명에게 모두 죽은 것이다.

문득 빌은 자신이 정말 운이 좋았다고 느끼는 한편, 그를 잡아온 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내내 프레이밍햄 자경단 리더들은 그 부랑자에 대한 처분에 대해 논의 했다.

빌이 열심히 소명을 했지만 다들 우스터와의 관계 악화에 대해 걱정하는 눈치였다.

회의는 길어졌고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하고 일단 종료되었다.

회의장을 나와 쓰레기통 앞에서 담배를 꼴아 물고 라이타를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누군가가 옆에서 라이터를 켰다.

"신경질 부리지마, 빌."

"스티브."

"FAS 새끼들을 다 쳐 죽인 건 우리로서도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를 보호해 줄 수는 없는 일이야. 너도 잘 알잖아."

"다 족 까라 그래."

"그쪽에서도 안나가 적극적으로 소명하고 있다고 하더군. 우스터로 가더라도 반드시 죽게 되지는 않을 꺼야."

빌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안나?"

"그 일을 당한 여자 말이야."

괜히 물어봤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린 빌은 피고 있던 담배를 필터 앞까지 깊게 빨아들였다가 후욱 뱉어냈다.

아무렴 그 여자가 말한다고 들어줄 상황이었으면 그 사단이 났을까.

빌은 더 이상 이야기를 듣기 싫다는 듯 몸을 돌려 걸어가다가 스티브를 향해 말했다.

"준비해 달라고 했던 것들, 오늘 받으러 갈 테니 기다려."

"뭐? 아직 충분하지 않은데?"

"되는 대로만!"

답답한 마음에 빌은 다시금 그 부랑자를 찾아갔다.

"일이 잘 안 풀리는가 보군. 표정이 너무 어두워 보여."

술 한번 같이 마셨다고 벌써 친구가 된 듯 많이 누그러진 말투였다.

빌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별일 아니야. 좀 화나는 일이 있었을 뿐이야."

어찌보면 눈 앞의 이 사내는 자신에게 영웅이었다. 자신이 하지 못했던 일은 이 남자는 해냈지 않은가.

프레이밍햄에 오기 전 빌은 실은 우스터에서 잠시 머물렀었다.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가정을 이룰 생각을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 저변에는 FAS 의 행포가 있었다. 

잠시 마음을 주었던 그녀는 FAS의 독촉에 못 이겨 사냥을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아무도 지금은 저 밖 어딘가를 떠돌고 있겠지. 아니면 인간에게 죽었거나.

그때부터 FAS를 증오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결국 그는 프레이밍햄으로 다시 이주해왔다.

해가 지기 전 결국 우스터에서 연락이 왔다. 부랑자를 자신들이 압송해가겠다는 것이었다.

빌은 그러지 말자고 다른 방도가 없겠냐고 요청을 했지만 보기 좋게 묵살 당했다.

보상으로 배급증을 잘 챙겨줄 테니 받아가라는 말에 하는 수 없이 배급소로 향했다.

배급소 앞에는 어제 부랑자를 지키던 대원이 서있었다.

"그레이엄, 오늘은 여기 보초인 거야?"

"네, 빌. 배급증 받으러 오셨어요? 아직 배급일이 아닌데..."

"어제 그 부랑자 체포 보상 건이야."

그레이엄은 수긍한 듯 문에서 비켜서고는, 안으로 들어가는 빌에게 지나치듯 물었다.

"오늘 중으로 석방 되나요? 그 사람..."

"아니, 이따가 우스터에서 사람이 오기로 했어."

그레이엄은 놀란 듯 빌을 따라 배급소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소리를 낮춰 물었다.

"우스터에 넘기지 않기로 약속하셨잖아요."

"제길, 자경대 리더 따위 군인들 결정을 어길 수 있겠냐? 퉤!"

그레이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빌은 그렇게 믿을만한 리더는 아니었지만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도 할만큼은 했을 것이다.

투덜거리며 배급증을 챙겨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던 그레이엄은 그렇게 되뇌었다.

한편 갇혀 있던 부랑자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잠깐 들렸던 빌의 모습은 불길함을 암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갇혀 있는 이상 부랑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더이상 이대로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이 들게 된 것은 여러 대의 지프가 도착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 밖에 소란스러워진 후였다.

그때 문이 열렸다.

처음보는 자경대원 둘이었다.

그들은 부랑자에게 자신들을 따라오라고 말했지만 부랑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빌은 어디 있지? 빌과 이야기 하겠다."

"빌은 순찰을 나갔어. 오후 늦게나 돌아올 꺼야."

그러면서 그들의 총구가 부랑자를 향했다.

"얌전히 따라 나오시오."

부랑자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끌려 나가면 죽음 말고 다른 결말이 있을까?

곱게 고통 없이 죽으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길지 모른다.

부랑자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그들의 말에 따르는 수 밖에 없었다.

방을 나와 층계로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가 자경대원들을 덮쳤다.

놀란 그가 뒤를 돌아보니 어제 빌과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던 대원과 모르는 여자였다.

"그레이엄... 이라고 했던가?"

"맞아요. 이쪽은 테스예요."

깡마르고 키가 큰 체구의 여자가 고개를 까딱였다.

부랑자와 그레이엄은 서둘러 테스를 쫓아갔다.

프레이밍햄 격리구역은 아직 그 규모가 작다.

하지만 어디에도 비밀스러운 통로는 있기 마련이었다.

테스는 특히 그런 길들을 잘 알고 있었다.

갖혀있던 곳의 옆 건물 지하로 내려간 테스는 지하도 같은 통로로 인도했다.

통로 끝의 문에 도착해서는 가방에서 방독면을 꺼내 부랑자에게 건네었다.

"여기부터는 포자야. 쓸 줄 알지?"

부랑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독면을 건네 받아 착용했다.

퀘퀘하고 역한 냄새에 숨이 막혔지만 건물 위가 소란스러웠다. 부랑자의 탈출이 발각되었을 것이다. 방독면의 냄새 따위에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모두의 방독면을 확인한 테스가 문을 열었다. 문 너머로 어둠 속에서도 자욱한 포자들과 벽면에 붙어 성장한 균사체들이 느껴졌다.

조용히 포자의 지하도를 걸었다. 미로같이 구불구불하고 여러 갈림길들이 있었지만 테스는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한참을 그렇게 걷더니 한 사다리 앞에서 멈춰 섰다.

테스가 먼저 올라가 맨홀 뚜껑을 어깨로 밀어 올리고는 눈만 내밀고 주변을 살펴 보았다. 충분히 살펴 보고서야 테스트 뚜껑을 완전히 밀어 올려 옆으로 치우고는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 한적한 숲길이었다.

부랑자는 그레이엄과 테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테스는 그를 재촉했다.

"아직 안심하기 일러. 앞으로 한 시간 정도는 더 뛰어야 해."

부랑자는 자신의 다친 발을 힐끔 바라보았다. 테스는 그 발을 보고는 2시간이라고 정정했고 그레이엄은 부랑자에게 다가가 자신이 부축할 의향을 내보였다.

부랑자는 상황을 수긍하고는 그레이엄의 도움을 받아 들였다.

그렇게 30분을 뛰고서야 겨우 쉴 수 있었다.

다행히 그들이 가는 길에 감염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길바닥에 털썩 주저 않은 부랑자는 오는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왜 나를 구해준 거지?"

그레이엄이 테스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대답했다.

"전 당신이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냈어요."

"그렇다고 당신이 살고 있는 터전을 포기한단 말이야?"

주변을 살펴보고 있던 테스가 내뱉듯 대답했다.

"진작에 빠져 나오려던 참이었어."

한마디 하고는 테스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실은 우리도 프레이밍햄에서 밀수 같은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있었어요. 딱히 조직명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그런데 한달 전 우리 쪽 사람들이 우스터에서 당하고 왔어요. 제 친구들이 모두 죽었죠."

"그래서 복수냐 철수냐를 두고 아직까지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는데... "

"덕분에 하나의 선택지가 사라졌으니 이제 우린 나머지 선택지를 선택한 거예요."

"그것이 날 구한 이유는 아닐 텐데?"

다시 테스가 퉁명스럽게 끼어들었다.

"우린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해."

"거기에다 조직 하나를 혼자서 쓸어버릴 정도의 능력자이면 더욱 좋겠지."

부랑자는 테스의 뒷 모습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도와준 것은 당연히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좋은 제안이었다.

"너희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

"아~ 싫으면 말라고. 자원 봉사한 셈 칠 꺼야."

그리고는 다시 출발하자고 재촉했다. 

바지를 털며 일어서려는 순간 자경대원들이 들이닥쳤다.

총 4명의 자경대원들이 부랑자 일행을 포위하고 총을 겨누었다.

테스와 그레이엄도 총을 꺼내려고 했지만 그들이 쏜 위협 사격에 바로 저지 당했다. 테스와 그레이엄은 순순히 무기를 내려 놓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들의 얼굴을 확인 한 테스가 말했다.

"모르는 얼굴들이군. 우스터 쪽 사람인가?"

권총을 겨눈 채 부랑자에게 다가가 얼굴을 확인하던 남자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당신은 그 유명한 테스군."

"이쪽 길을 선택하길 잘했군. 덕분에 우리가 프레이밍햄 녀석들보다 먼저 놈을 잡았어. 게다가 선물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테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을 덮친 자경대원들은 프레이밍햄 대원이 아닌 우스터 자경대원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프레이밍햄에 부랑자를 데리러 왔다가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고 추격대가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들의 리더가 FAS 와 연관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테스는 이 만남이 결코 좋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 땅에 스물스물 들어와서 장사를 하길래 버릇 좀 고쳐주었더니 아직까지 포기하지 못한 거야? 테스."

리더의 이죽거리는 말에 테스가 급히 대답했다.

"우린 더 이상 그쪽으로 사업하지 않을 꺼야. 이대로 철수하겠어. 그러니 오늘은 서로 못 본 것으로 하자고."

"그건 말이 안되지. 테스."

우스터 자경대의 리더는 총구를 부랑자의 머리로 향했다.

"우선은 이 자식을 죽이고 나서 이야기 해보자고."

리더의 총이 발사되려는 순간 부랑자의 머리 대신 리더의 머리가 뚫렸다.

놀란 다른 대원들이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총소리와 함께 다시 한 명의 머리에 구멍이 났고 다른 두 명은 그레이엄과 테스가 제압했다.

그제서야 숲 속에서 소총을 든 남자가 걸어 나왔다.

빌이었다.

일행 앞까지 걸어 나온 빌은 가차없이 다른 두 명에게도 총을 쏘아 사살했다.

그리고는 부랑자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손을 맞잡고 일어났다.

빌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미안하군. 일이 이렇게 되어버려서..."

부랑자는 아무 말 없이 그가 건네는 자신의 짐을 건네 받았다.

그리고 다시 그레이엄에게 기대어 테스와 함께 길을 뛰기 시작했다.

빌 역시 잠자코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1시간을 더 달리고서야 숲을 빠져 나왔다.

남북으로 이어진 도로가 길게 늘어서 있었고 군데군데 방치된 자동차들이 보였다.

숨을 거칠게 내쉬던 부랑자는 빌에게 말했다.

"당신은 이제 어쩔 셈이지?"

빌은 자신이 주렁주렁 짊어지고 있는 짐들을 힐끗 눈짓하고는 말했다.

"좀 더 위로 올라가면 링컨 마을이 있어. 한적한 곳이지. 그곳에다가 혼자서 살 생각이야."

"그렇군."

부랑자는 이번에는 테스에게 말했다.

"당신을 따라가겠어. 동생은 이미 보스턴에 도착했을 거야. 그 녀석까지 돌봐준다고 약속해줘."

테스는 고개를 까딱이며 승낙했다.

그리고는 남쪽 길로 내려가다가 보스턴으로 가는 동쪽 도로를 통해 갈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반대로 빌은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몇 발자국 못 가서 빌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직 이름을 안 물어봤군."

부랑자는 고개만 슬쩍 돌려 말했다.

"조엘, 조엘 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