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테이가, 벤틀리 중 가장 웅장해 보이는 이유.jpg

[김종훈의 차문차답(車問車答)] 벤틀리가 벤테이가를 발표했을 때 올 것이 왔다고 느꼈다. 포르쉐가 카이엔을 성공시킨 이후로 시간 문제였다. SUV는 모든 브랜드의 훌륭한 먹을거리였으니까. 브랜드는 언제나 신선도를 유지해야 한다. 기존 모델을 발전시키는 것보다 신모델을 투입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포르쉐의 도전이 대중의 인식도 바꿔놓았다. 복지부동하던 브랜드들이 움직일 계기가 됐다. 중요한 건 하나였다. SUV라는 그릇에 어떻게 브랜드를 녹여낼 것인가. 그것만 이룬다면야.

Q. 벤테이가는 벤틀리를 어떤 식으로 품고 표현할까?

벤테이가를 보면 벤틀리의 기함 뮬산이 떠오른다. 크고 탐스럽다. 전고가 높기에 네모반듯한 덩어리 느낌을 이었다. 다른 모델들도 덩어리의 질감을 살렸지만 뮬산만큼 고색창연하진 않다. 뮬산의 반듯함은 고풍스러움을 상징한다. 거대한 성 같은 견고함을 품는다. 그물망처럼 꼬인 그릴도 고성의 성문처럼 예스럽다. 그 양옆을 성문의 횃불처럼 동그란 전조등이 장식한다. 과거에도, 앞으로도 변치 않을 구성. 벤틀리의 기품을 유지한다. 뮬산이 그렇고, 벤테이가도 그렇다. 모터스포츠에서 활약하던 시기가 연상되는 다른 모델과는 인상이 다르다.

벤테이가가 뮬산과 닮은 건 벤테이가가 담아야 할 벤틀리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럭셔리 브랜드로서 어떤 기품. 성능보다, 무엇보다 먼저 담아야 할 요소. 신모델인 벤테이가에겐 혈통을 잇는 일은 중요하다. SUV라는 새 식구를 부드럽게 받아들일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뮬산과 닮았기에 벤테이가를 처음 봤을 때 이질감이 적었다. 뮬산 자체도 원래 육중하게 보인다. 차량 벨트라인이 높다. 기함의 묵직함이 배어 나온다. 뮬산과 닮았기에 키 높은 벤테이가가 낯설게 보이지 않는다. 낯설기는커녕 벤틀리 중 가장 웅장해 보인다. 분명 득이다.

실내에선 외관의 득이 더욱 빛난다. 화려할수록 웅장한 공간이 어울리잖나. 천고 높은 대저택처럼 벤테이가의 머리 공간은 한결 쾌적하다. 주변 어디를 돌아보고 만져보든 허투루 남겨놓은 부분이 없다. 가죽으로 도배한 방 같은 호사스러움이 오히려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런 이질감이야말로 럭셔리 자동차의 매력이다. 슈퍼 스포츠카는 비현실적 성능과 소리로, 럭셔리카는 비현실적 소재와 질감으로 비일상적 쾌감을 선사한다. 그런 점에서 벤테이가는 합격점이다. 웅장하고 화려한 SUV. 아니, 굳이 SUV라고 장르를 떠올릴 여유도 주지 않는다. 그냥 더 웅장하고 화려한 벤틀리. 벤테이가는 SUV에 갇히지 않는다.

벤테이가는 확실히 이질적이다. 원래 공도에서 벤틀리를 보면 낯설지만, 벤테이가는 더욱 그렇다. 플라잉 스퍼나 컨티넨탈 GT와는 다른 고풍스러움 덕분이다. 뮬산 쪽으로 더 기운 느낌의 영향이 크다. 해서 이 이질적인 벤테이가를 타고 한국 어딘가를 간다는 것 자체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유럽 어디 귀족 별장 앞에 세워져 있다가 근처 바닷가 정도 오가는 장면만 머릿속을 맴돌 뿐이다. 해변에서 벤테이가 전용 집기 트레이를 펼치는 모습 또한. 이질적이기에 도리어 매력적이다. ‘낯설게 하기’는 럭셔리 자동차가 선망의 대상이 되는 이유니까. 벤테이가는 SUV 형태라서 더 진하다. 벤트리의 풍요로움을 표현하는 데 잘 활용했다.

벤테이가의 성능은 실내 재질만큼 부족함이 없다. W12 6.0L 트윈터보 엔진은 아쉬움 운운할 대상이 아니다. 최대토크 91.8kg·m가 밀어붙이는 힘에는 어떤 쾌감마저 느낀다. 2.6톤의 거구라지만, 거구라서 더 묵직한 가속력이 일품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허용한다. 코너를 잘 파고드는 SUV도 있지만, 벤테이가는 그런 성격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코너를 편안하게 돌아나가는 데 집중한다. 속도가 너무 높으면 알아서 제동하면서까지. 서킷 코너에서 제동하며 자세 잡아가는 벤테이가를 타면서 성격을 알아차렸다. 토크와 편안함. 어떤 식으로 차를 즐기라고 하는지 벤테이가가 명확히 얘기했다.

주행 성격까지 경험하니 더욱 확실해졌다. 벤테이가는 신모델로서, 오히려 벤틀리의 귀족적 이미지를 강조한다. 그동안 나온 신모델과는 다른 전략이다. 컨티넨탈 시리즈가 벤틀리를 젊게 했다면, 벤테이가는 벤트리를 기품 있어 보이게 했다. 청바지 입던 벤틀리가 다시 스리피스 수트를 꺼내 입었다. SUV라는 신흥 장르를 활용한 벤틀리의 노련한 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