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자행되던 남영동 대공분실 자리, 국가폭력의 일상성 드러내는 전시의 장으로

고문 자행되던 남영동 대공분실 자리, 국가폭력의 일상성 드러내는 전시의 장으로
전현진 기자 [email protected]

다음달 25일부터 한 달 동안 서울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리는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 - 여성서사로 본 국가보안법’은 구술기록 작가단이 만난 국가보안법 피해 여성 11명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전시다. 과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수사하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전시 장소가 된 것이 상징적이다. 국가보안법을 무기로 고문이 자행되던 이곳은 국가보안법의 피해와 공포, 문제점과 폐지의 당위성을 드러내는 전시의 장이 된다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추진위원회’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이 주최한 이번 전시는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을 다시 전개하기 위해 마련됐다.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은 2004년 국회에서 폐지 입법이 실패한 뒤 적극적으로 추진되지 않았다. 이번 전시는 국가보안법이 특정 개인에게만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 국민 모두의 표현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률이라는 점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중점을 뒀다. 전시 주제를 논의하던 중 국가보안법을 겪은 여성들의 서사를 활용하기로 했고, 구술기록 작업에 들어갔다.

국가보안법을 겪어 낸 여성들의 이야기로 전시를 기획한 건 국가보안법이 지닌 일상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국가보안법을 겪은 여성들의 이야기는 국가·분단·통일·체제·사상 등 주로 남성적 시선으로 해석되는 거대담론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삶에 작용한 국가보안법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있냐”고 묻는 이들이 많은 것처럼, 이미 없어졌다고 여기거나 과거의 일로만 여기는 이들에게는 지금도 우리 삶 가까운 곳에서 그 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려 했다.

‘미투’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중요하게 떠오른 젠더 이슈에 호응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동안 국가보안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여성들의 이야기는 소외돼 왔다. 학교나 거리에서 투쟁을 벌이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한 가족의 옥바라지를 하고 생계를 이어나간 수많은 여성들이 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이 과거 ‘운동권’으로 불리는 남성들의 사회 경력으로 활용됐던 것과 달리 여성들의 활약은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다. 여성이자 운동가로서의 개인보다는 누군가의 어머니와 아내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전시는 국가보안법을 겪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워 국가보안법을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프로그램들로 채워졌다.

전시는 ‘여성서사로 본 국가보안법’과 ‘국가보안법 연대기’로 나누어 구성된다. 메인 테마인 1부 ‘여성서사로 본 국가보안법’은 구술기록에 담긴 여성 11명의 이야기를 배우 문소리와 조민수, 영화감독 김일란과 임순례, 소설가 정세랑과 황정은, 래퍼 슬릭, 가수 요조, 문학평론가 손희정, 세월호참사 희생자 고 김시연 어머니 윤경희씨, 이상희 변호사 등이 직접 읽어 목소리를 통해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개방형 화장실과 침대, 고문에 쓰인 욕조가 놓인 5층 조사실을 전시장으로 활용했다.

2부인 ‘국가보안법 연대기’는 국가보안법의 탄생부터 현재까지의 역사적 맥락을 인포그래픽 등 기법으로 표현한다. 4층에 꾸린 전시장에 국가보안법 관련 소송 서류 등 사건 자료를 선보인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에서 기증한 200여개의 사건자료 중 9개의 국가보안법 사건을 분석하고 정리했다. 1948년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의 72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지난 16일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전시 기획 등을 맡은 권은비 예술감독은 “지금까지 국가보안법 72년 역사에서 ‘여성들의 싸움’을 놓치고 있었다”며 “패배감이라는 감정 대신 여성들이 오랫동안 맞서 싸워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시를 고민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