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랑(激浪·거센파도), 갈등 중심에 '한국형발사체'
로켓 분야 주도권 둘러싸고 현-전 원장 '샅바 싸움'
항우연 내부 싸움 알고도 묵인한 과기부

3년 묵은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내부 갈등이 마침내 폭발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올해 이미 한 차례 감사한 사안을 재차 특별감사해 임기 50일 남은 기관장에게 해임을 통보하자 과학계도 술렁이고 있다. 과학계에선 '일사부재리 원칙'에 위배되고 출연연 47년 역사상 품위 손상으로 인한 해임은 유례없는 일이라며 '기관장 찍어 내리기'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임 원장은 감사 결과가 부당하다며 재심의를 요청할 것으로 알려져 이 사안의 발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과기부 감사로 촉발된 이 사안 중심에는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가 있다. 한국형발사체(누리호) 개발 책임이 있는 항우연과 한국형발사체본부에 대한 전권을 쥐고 있는 과기부 사이에서 벌어진 비정상적인 시스템이 빚어낸 결과다. 표면상 내부 갈등은 3년이지만,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 문제는 2000년대 초반부터 개발된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질적으로 20년 묵은 갈등이다.

◆ 권한은 과기부, 책임은 항우연

나로호(KSLV-1)는 2000년대 초반부터 정부가 5025억원을 들여 전략적으로 개발에 나선 발사체(로켓)다. 우주 기술 독립과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발사체 기술 독립을 위해서다. 나로호는 전례 없던 기술 개발 과정에서 여러 기술적 난관에 부딪혔다. 첫 발사체 개발이었던 만큼 발사 계획이 몇 차례 연기되고, 1차(2009.08), 2차(2010.06) 발사에 실패했다. 우여곡절 끝에 3차(2013.01) 발사 시도 만에 이뤄낸 값진 성과였다. 당시 연구 책임자였던 조광래 박사(우주발사체연구본부장)는 두 차례 실패와 성공을 모두 경험했다.

나로호 발사가 두 차례 실패했을 무렵 이주진 전 항우연 원장(2008.12~2011.02)이 책임을 지고 중도 퇴임했다. 다수 항우연 관계자는 당시 교육과학기술부 내부에서 나로호 발사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고, 이를 이 원장이 받아들여 자진 사퇴하는 모습으로 사태가 일단락됐다고 한다. 

교과부는 나로호가 성공하고 후속 사업으로 누리호(KSLV-2)를 계획했다. 나로호는 2단형, 누리호는 3단형 발사체다. 당시 교과부는 나로호 발사 실패 원인을 '국내 전문가 역량 미결집'으로 봤다. 항우연 내부 인원으로만 발사체를 개발하니 외부 기술이 결집될 수 없다는 분석이었다. 그래서 결정한 사안이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단(누리호)을 개방형 사업단(외부 독립기관)으로 조정한 것이다. 외부 독립기관으로 사업단장은 항우연이 아닌 과기부가 선임하도록 했다. 권한은 과기부, 책임은 항우연이 지는 시스템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 한국형발사체본부 전임 원장의 사조직?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은 2010년부터 2022년까지 총 1조9572억원이 들어가는 사업으로, 사업 기간 12년을 3번에 나눠 사업단장을 선임하기로 했다. 외부 독립기관으로 출범했기 때문에 초기 4년은 외부 출신 박태학 ADD(국방과학연구소) 박사가 이끌었다. 그 시기 나로호 개발 총책임자였던 조광래 전 우주발사체연구본부장이 원장(2014.10~2017.10)으로 선임됐다.

조광래 전 원장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당시 상황을 "외부 인사가 누리호 발사를 총지휘하면서 기술개발이 더디고 각종 문제가 벌어졌다"고 돌아봤다. 조 전 원장은 당시 외부 독립기관이었던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단을 항우연 내부로 다시 가져왔다. 이어 2015년 8월부터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단을 본부로 격상하고, 중간 4년을 맡을 책임자로 내부 출신 고정환 박사를 선임했다. 항우연 다수 관계자에 따르면 이때 나로호 보직자들이 누리호 보직자로 대거 들어왔다고 한다. 

문제는 외부 독립기관이었던 본부가 내부로 들어왔는데, 운영관리지침은 외부 독립기관처럼 그대로 뒀다는 점이다. 한국형발사체 개발 권한은 과기부, 책임은 항우연이 지는 구조가 계속된 것이다. 일각에선 책임만 과중한 항우연이 한국형발사체본부 인사 권한을 가져올 수 있는 상황에서도 지침을 변경하지 않은 점을 두고 여러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한국형발사체본부가 항우연 내부 조직임에도 임 원장이 인사를 단행할 수 없게 된 건 과기부와 연결된 또 다른 원장, '상왕'이 존재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임 원장은 조 전 원장의 후임자다. 익명을 요구한 항우연 부서장은 이때부터 한국형발사체본부를 조 전 원장이 사조직화했다고 주장한다. 조 전 원장이 나로호 발사를 총괄하고 이후 누리호 개발 과정에서도 중책을 맡았기 때문에 과기부로서는 조 전 원장이나 발사체본부 의견을 듣지 않을 수 없다는 근거다.

◆ 손발 묶인 현 원장 임철호

임 원장은 2018년 1월 취임하고 '인력 효율화'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항우연 내부 연구개발 분야는 크게 발사체, 위성, 항공 분야로 나뉜다. 연구자들은 기본적으로 2~3개 과제에 참여해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임 원장은 기계, 항공, 위성, 전자, 통신 등 각 분야 연구자들이 모여 연구 과제에 유연하게 참여할 수 있는 '매트릭스 조직' 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임 원장은 한국형발사체 개발이 후반기에 이른 만큼, 누리호 초기 설계와 개발에 참여했던 인력 일부에 업무 여유가 생겼다고 판단했다. 임 원장이 역점 추진한 '인력 효율화'를 한국형발사체본부에도 적용하려고 시도했다. 스페이스X, 블루 오리진 등 뉴스페이스 시대에 부합하는 미래 발사체 연구를 위해서다. 한국형발사체 연구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미래 발사체 연구를 기획, 설계하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한국형발사체본부가 조직 변동을 거부했다고 한다. 임 원장 취임 이후 한국형발사체 조직은 23개로 그대로지만, 이외 연구조직은 56개에서 28개로 변모해 매트릭스 조직으로 운영되고 있다.

임 원장에 따르면 취임 후 한국형발사체본부 인사를 단행하는 과정에서도 역풍을 맞았다. 연구자 고충을 청취하고 한국형발사체본부 부서장 2명에 대한 교체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인사를 실시했지만, 당시 유영민 과기부 장관이 한국형발사체 팀장 인사를 왜 하냐는 질타에 인사가 무산되기도 했다. 유 전 장관이 '인사 반대' 의사를 표한 자리에는 당시 원광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과 최원호 과기부 거대공공연구정책관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 발사체 조직 이동하자, 연구 참여율 '제로' 

임 원장이 주장한 인력 '매트릭스 구조'는 한국형발사체본부에서도 일부 호응을 얻었다. 전체 연구자 250명 중 12명이 공감하고 누리호 개발과 미래 발사체 연구를 병행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 자체가 진통을 낳았다. 한국형발사체본부는 '미래발사체연구단'으로 인력을 이동할 수 없다며 인사를 파견�g다.  

게다가 미래발사체연구단으로 파견 나간 연구자들이 한국형발사체본부로부터 보복(?)을 당했다. 한국형발사체본부는 연구자 12명에게 연구 과제 참여율 0%를 통보하고 그간의 연구에서 배제했다. 연구자 12명은 각 분야에서 9년 넘게 연구에 참여했던 이들이다. 이 때문에 초기 12명 중 2명은 다시 한국형발사체본부로 돌아갔다. 현재 미래발사체연구단 연구자들은 누리호 개발에 9년 동안 참여했지만, 지난 5월부터 연구 참여율이 제로다. 누리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돼도 이들의 이름은 기억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익명을 요구한 미래발사체연구단 관계자는 "미래 먹거리인 소형 발사체 설계와 기획을 해보고 싶다는 이유로 8년 넘게 하던 일을 한두 달 만에 인수인계하고 나오는 상황이 벌어졌다"며 "연구자들은 연구에 참여할 수 없다고 통보받으면 위축이 많이 될 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한국형발사체본부는 내부에 상황이 있다는 설명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연구자는 "발사체는 똘똘 뭉쳐도 될까 말까이고 한 번 성공해야 그다음 성공이 보장되는 사업"이라며 "중압감이 큰 업무이고, 나로호 때부터 시스템으로 움직여왔던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임 원장은 '소형발사체 개발 관련 기획연구'를 추진했지만 불이익을 받았다. 당초 10억원이 배정됐지만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전문가 심의와 과기부 심의를 거쳐 연구비는 전액 미반영됐다. 그러다가 당시 과방위원장이었던 노웅래 의원이 문제를 지적하면서 예산 3억원이 재편성됐다. 원장이 추진하는 사업도 발사체라면 과기부 통제를 받는 상황이 된 것이다.

◆ 문제 알고도 묵과한 과기부

본지가 입수한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회의록을 보면 과기부는 항우연 내부 갈등을 여러 채널을 통해 확인했다. 우주개발 관련 업무를 관리했던 장 모 과장을 비롯해 거대공공연구정책과, 우주기술과 등에서 이 내용을 확인했다. 최기영 장관과 과기부 국·과장 대다수도 '항우연 내부에 원장이 2명 있다'는 제보를 간담회 등을 통해 확인했다. 그러나 문제를 파악하고도 이를 묵과하고 수년간 방치했다.

익명을 요구한 항우연 전임 원장은 "인력 효율화 문제는 항우연의 오랜 문제"라며 "임 원장이 항우연 내부의 오랜 문제에 손을 댄 것인데 조직원과 갈등 문제를 형사상 문제가 없는 상황에도 재감사해 해임 통보한 건 과도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앞으로 이런 현실이 계속되면 항우연뿐만 아니라 어느 기관장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겠나"라며 "조직원이 반발하면 아무것도 못 하게 되고 출연연은 무사 안일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문길주 전 UST(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총장은 항우연 문제가 과학계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다. 그는 "출연연 47년 역사에 품위 유지 등을 두고 해임 통보한 적은 없었다"며 "과기부가 임기 50일 남은 기관장을 해임 통보한 여파가 과학계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해봤다면 이런 일은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어 "설령 기관장이 현행범이라고 하더라도 조사가 나와야 결단을 하는 것인데, 이 문제는 원광연 이사장 재임 당시 이미 문제가 없다고 결과가 나온 사안"이라며 "어떤 이유로 이렇게 문제를 성급하게 추진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과학계는 항우연 갈등이 '심판'이어야 할 과기부가 '선수'가 되어 한 편을 들어 주었고, 운영의 책임을 준 기관장의 손발을 묶어 발생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책임 경영과는 거리가 먼 행위라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