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별곡 2 - 똥개와 봉투

“ 정선생 , 퇴근 후에 별 일 없지 ?”

중간고사 채점을 마치고 쉬고 있는 내게 연세 지긋하고 사람 좋아 보여 평소 호감을 느끼던 교련선생님께서 넌지시 물어오셨다 . 저녁에 남산 근처 중국요리집에서 몇몇 선생님들이 모여 식사를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

“ 글쎄요 ..."

중국요리라는 교련선생님의 말씀에 느글느글한 자장면이 떠오른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

“ 있다가 수업 끝나고 같이 가자구 ... 그렇게 알고 다른 약속 잡지 마 .”

대학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가 된 지 몇 달밖에 안 된 애송이 교사인 나는 고참 선배교사의 말씀에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퇴근 후 교련선생님 두 분 , 체육선생님 두 분 , 충청도 출신의 말투 느릿느릿하고 사소한 일에도 잘 웃는 음악선생님 한 분 , 그리고 미술교사인 나 , 이렇게 6 명은 두 대의 택시에 나눠 타고 남산 소월길을 요리조리 올라갔다 . 잠시 후 으리으리한 고급 중국요리집 앞에 택시가 멈추고 우리는 교련선생님을 앞세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여기까지 온 것도 그렇고 , 예체능계 선생님들만 모였기에 단합대회 비슷한 건가 궁금했지만 쫄다구가 꼬치꼬치 묻기도 뭣해서 조용히 따라 들어가면서 이 집 자장면은 무지 비싸겠다는 괜한 걱정을 얼핏 했다 .

자장면집 종업원답지 않은 말쑥한 정장 차림의 웨이터를 따라 구석진 방에 들어가자 우아한 옷차림에 귀티가 나는 아름다운 부인 한 분이 잔잔한 미소로 우리를 정중히 맞이했다 . 곧이어 종업원이 희한하게 생긴 요리들을 진설했다 . 생김새와 달리 맛은 하나도 없고 미끈거리고 싱거운 그 요리들을 먹으면서 계란을 푼 라면과 신김치의 화끈한 맛이 그리웠지만 , 내로라하는 양반인 하동정씨 문절공 17 대손인 나는 한껏 점잖은 자세로 품위 있게 음식을 먹으며 선생님들과 귀부인의 조용조용하고 수준 높은 대화에 동화되려고 애를 썼다 . 그래봐야 별 흥미 없는 이야기뿐이라 관심 있게 듣는 척 그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느라 입 언저리 근육이 파들파들 떨렸지만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 참된 교육과 인생의 가치 , 청소년이 갖추어야 할 올바른 가치관과 한국 경제의 전망 등 절대로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은근히 걱정스럽던 수준 높고 격조 있는 대화가 마무리되면서 귀부인께서 핸드백에서 꺼낸 하얀 봉투를 특유의 우아한 동작으로 공손히 선생님들 앞에 하나씩 내밀었다 . 역시 공손하고 우아한 동작으로 그것을 받아든 선생님들은 머리 숙여 사례를 한 후 , 한껏 품위 넘치는 동작으로 그 봉투를 안주머니에 넣었다 . 이윽고 내 차례가 되었다 . 선생님들이 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기에 내 눈 앞에 내밀어진 하얀 봉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내 사지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 귀부인은 봉투를 내민 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 식은땀이 흘렀다 . 다섯 선생님들의 열 개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무서웠다 .

하지만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다 . 용감무쌍하고 당당하게 봉투를 물리치면서 일갈했다 .

‘ 이러시면 안 됩니다 . 전 학생을 올바르게 가르쳐야 할 신성한 교육자입니다 . 죄송하지만 거두어주십시오 .’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모범답안이었다 . 그러나 머리로만 알고 있을 뿐 , 그 정답을 답안지에 써 넣는 지극히 간단한 행위를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못하고 있었다 .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다른 선생님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이 정답이지 . 내 머릿속에 맴도는 행위는 공공의 무언의 행동강령을 위반하는 또라이의 만용이자 배신행위인 것이다 . 아 , 가위눌림이 꼭 잠자다 걸리는 것이 아니구나 ...

마침내 귀부인은 조용히 내 앞에 봉투를 놓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 눈앞에 놓인 흰 봉투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선생님들은 귀부인과 예의 그 품위 있는 대화를 조금 더 이어가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내쪽으로 강렬한 시선을 보내며 무언의 질책을 퍼부었다 . 옆에 앉은 선생님이 대화에 수반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척 하면서 교묘하게 내 옆구리를 쿡쿡 질러댔다 .

악몽 같은 시간이 흐르고 모두들 일어서는 낌새가 보였다 . 옳다구나 하고 제일 먼저 일어선 나는 잽싸게 밖으로 나왔다 . 잠시 후 사람 좋은 교련선생님이 내 주머니에 뭔가를 쑤셔 넣으며 빠르고 낮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

“ 정선생 , 대체 왜 이래 ? 입장 난처하게 ...”

“ 죄송합니다 ...”

주머니 속에 구겨 넣어진 봉투의 감촉이 생경스러웠다 . 분명히 꼬리를 흔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던져준 뼈다귀를 감지덕지 받아 물고 꼬리를 흔들어대는 똥개가 영락없이 바로 나라는 느낌이었다 . 기분이 더럽고 참담해진 하동정씨 문절공 17 대손 양반의 자손인 나의 입에서는 쌍시옷과 지읒으로 구성된 온갖 단어들이 궁시렁궁시렁 난무하고 있었다 .

‘ 이런 ㅆㅂ ... Nigimi  기분 ㄱㅐㅈ같네 ...’

다음 날 아침 , 사람 좋은 교련선생님이 말씀하셨다 .

“ 정선생 , 어제 같은 경우가 처음이라 기분이 어떤지 이해하지만 그러는 거 아니야 . 우린 도대체 뭐가 되나 ?”

“ 죄송합니다 ...”

“ 그건 그렇고 ... 고쳤어 ?”

“ 예 ? 고치다니요 ? 뭐를요 ?”

“ 이 사람 ... 몰라서 묻는 거야 ?”

“ 무슨 ... 말씀이신지 ...”

“ 참 답답하네 ... 어제 그 아주머니가 학생회장인 XXX 엄마야 .”

“ 그런데요 ?”

“ 어이구 ... 환장하겠구만 이거 ... 잠깐 기다려봐 .”

교련선생님은 교무실 벽의 철제 캐비넷을 열고 채점지 한 뭉텅이를 가져와 한 부분을 펼치더니 내게 내밀었다 . 바로 그 학생회장 아이의 중간고사 미술 채점지였다 . 붉은 사인펜으로 쓴 81 점의 점수가 눈에 들어왔다 .

“ 빨리 고치고 도장 찍어 .”

그제야 나는 어제의 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 나는 머리통을 감싸 쥐고 엎드리면서 신음을 토했다 . 교련선생님은 그런 내 머리맡에 채점지를 놓으며 말했다 .

“ 괜히 여러 사람 난처하게 하지 말고 어서 고쳐서 제 자리에 갖다 놓아 .”

교련선생님이 물러가고 난 후 채점지를 멍 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 80 점이면 ‘ 우 ’ 이고 90 이상이면 ‘ 수 ’ 인데 , 최종성적은 수우미양가에 따른 환산점수로 올라갈 뿐 숫자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 그 학생의 미술점수는 89 점이 되었고 , 결과적으로 고치기 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

흰 봉투 안에 들어있던 ‘ 물체 ’ 는 내 호주머니 안에서 꽤 오랫동안 갈 곳을 못 찾고 처박혀 있다가 어느 날 내무장관에게 발각되었고 , 그 후 소식은 모른다 . 그 날 이후 나는 회식 자리는 물론 학부모를 철저히 피해 다니는 노이로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

뱀다리) 내가 유달리 깨끗하고 양심적이고 돈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어서가 결코 아니라, 비열하고 이중적이며 쓰레기라는 자괴감에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할 이야기에서 밝혀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