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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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무엇이든 나는 그걸 원하는 것 같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딸기밭으로 와 딸기를 따.”
딸기에서 딸기로, 딸기밭 바깥 국경 너머로
슬픔을 넝쿨처럼 엮으며 멀리 뻗어 가는 손길
늘 곁에 있어도 닿지 못했던 이방인에게,
그리고 나에게 기도하듯 보내는 편지
김숨 장편소설 『딸기 이론』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역사의 격랑 한가운데서부터 오늘날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까지, 평범한 이들의 연약한 삶과 목소리를 문학으로 쉼 없이 옮겨온 김숨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이다.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디아스포라 난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그리고 목숨을 건 현장에 선 노동자, 시각장애인까지. 그동안 김숨 작가가 문학의 주체로 세운 인물들 곁에 『딸기 이론』이 새로운 목소리로 등장했다. 바로 여성 이주 노동자의 목소리다.
『딸기 이론』은 한 통의 긴 편지처럼 쓰인 소설이다. 이 편지를 쓰는 주인공은 한국 어느 딸기밭 비닐하우스에서 7년째 숙식하며 일하는 미얀마인 여성 노동자 ‘샤빼’다. 편지는 “나는 한 사람으로 왔어.”라는 선언으로 시작되어, 곧 “너도 똑같아.”라는 ‘너’를 향한 호명으로 이어진다. 이 소설에서 ‘너’는 캄보디아 출신 여성 이주 노동자 ‘보파’다. 그는 샤빼보다 먼저 한국에 와 지금까지도 딸기밭을 떠나지 못하는 노동자, 그러나 체류 자격이 사라져 일명 ‘불법체류자’라 불리는 미등록 이주 노동자로 이 딸기밭에서 가장 낮은 사회적 위치에 처한 인물이다. 그런 보파를 ‘너’라고 부르며 끊임없이 말을 거는 ‘나’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는 소설을 읽는 동안 보파의 자리에서 보파의 시선으로 『딸기 이론』 속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들이 하루 종일 손에 쥐었다 놓는 딸기처럼, 이들의 세상은 딸기를 중심으로 굴러간다. 아니, 사실 딸기는 모든 것이다. 딸기는 블랙홀처럼 전 세계의 가난한 여자애들을 이주 노동자로 불러 모은다. 딸기는 돈이 되고, 돈은 총알이 되어 국경 너머 사방으로 지뢰처럼 터져 나간다. 딸기는 사슬처럼 여자애들의 손을 묶지만, 딸기를 따는 손은 노동하는 다른 손을 궁금해하며 넝쿨처럼 뻗어 나간다. 길 건너 비닐하우스에서 깻잎을 따는 손, 돼지와 닭과 함께 갇힌 손, 커다란 기계에 끼인 손, 뜨거운 쇳물을 뒤집어쓴 손, 죽어 가며 온기를 찾는 손, 그리고 미얀마 강가에서 생선을 손질하는 엄마의 손까지. 그 손들을 잊지 않으려, 때로는 닿으려, 샤빼는 말하고 또 말한다. 머물 수도 떠날 수도 없는 이 딸기밭에서, 끔찍하게 싫지만 손에 쥘 수 있는 유일한 실체 ‘딸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해 보려 한다. 가설을 세우고 분석하며, 논증하고 정의 내리며, 때로는 반박하고 전복하며, 지금 발붙인 이 땅에서 희박하기만 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탐구하고 탐험한다. 그렇게 한 편의 아름다운 ‘딸기 이론’이 완성된다. 곁에 두고도 몰랐던 세계, 그러나 우리의 삶과 평행우주처럼 닮은 그 세계가 우리 앞에 도착했다.
작가정보
저자(글) 김숨

1974년 울산에서 태어나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느림에 대하여」가, 1998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중세의 시간」이 각각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로 일본군‘위안부’의 목소리를 담은 『한 명』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듣기 시간』 『간단후쿠』를 비롯해, 1930년대 디아스포라의 삶을 다룬 『떠도는 땅』, 식민 지배의 상처를 그린 『잃어버린 사람』, 태평양전쟁 당시 오키나와에서의 조선인 참살을 다룬 『오키나와 스파이』, 조선소 노동자의 삶을 다룬 『철』 『제비심장』 등이 있고, 시각장애인의 삶을 다룬 연작소설 『무지개 눈』이 있다. 소설집으로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 『침대』 『간과 쓸개』 『국수』 『당신의 신』 『나는 염소가 처음이야』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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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부
자궁 11
국경 36
딸기 실존 58
딸기 연애 84
딸기 계급 96
접시저울 100
딸기 불면 118
불타는 노트 123
자전 131
딸기돼지 146
딸기 미래 157
딸기 중력 181
딸기의 한계 184
딸기 통제 200
딸기 권력 206
갈색 213
2부
손 219
기도 228
집 233
심장 239
리얼 보트 249
3부
절대영도 259
딸기 따는 여자애 271
얼굴 277
딸기 이후 286
거울 298
두 번째 자궁 304
비행기 308
문턱 321
딸기의 탄생 326
지평선 329
미주 332
발문 오경진(문학평론가) - ‘너’에게로, 영원히 333
추천의 글 오은(시인)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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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오은 (시인)
딸기 따는 손은 줄기차게 문을 두드린다. 있기 위해서, 제대로 존재하기 위해서, 함께 살기 위해서. 말이 통하지 않고 마음을 나눌 수 없는 국경에서도, 삶은 매일 기지개를 켠다.
오경진 (문학평론가)
“웨어 아 유 프롬?” 당신은 어디에서 왔느냐는 물음. 그 질문에 “난 한 사람으로 왔어.”라는 말은 대답이 될 수 있을까. 그로부터 ‘대화’가 시작될 수 있을까.
소설은 ‘보파’라는 이름을 가진 ‘너’에게 끝없이 말을 건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나’는 ‘나’로부터 멀어질 수 없기에, ‘나’에게서 ‘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무한히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만날 ‘너’에게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엄청난 속도로 광막한 우주를 여행하는 보이저 1호가 품은 추동력의 근원은 이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존재의 근거를 잃어버린 삶이 품을 희망도 그와 같을지 모른다. 우리는 이 땅에서 ‘너’를 만날 수 있을까. 뿌리 뽑힌 자들의 슬픔을 찾아 나서는 작가 김숨의 소설이 이 땅에 온 이주민들에게, 그리고 소설을 통해 이들을 만난 우리에게도 위안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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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미얀마어로 자궁은 ‘타에인’이야. 그 단어는 ‘타(딸)’와 ‘에인(집)’, 두 단어로 분리할 수 있어. 토막 낸 물고기처럼 떨어뜨려 놓은 두 단어를 다시 이어 붙이면 ‘딸의 집’이 돼. ‘타에인’이라는 단어를 읽고 쓸 수 있게 된 뒤로 자궁은 내게 열쇠를 잃어버려 열 수 없는 문의 열쇠 구멍이 됐어. - 13쪽, ‘자궁’에서
우리는 딸기를 따. 딸기가 없어도 딸기를 따. 우리가 딴 딸기로 이 나라 사람들은 딸기케이크를 만들어. 딸기 왕관을 쓴 딸기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붙이고 생일을 축하해. 해피 버스데이 투 유. - 27쪽, ‘자궁’에서
너는 밤마다 일기를 써. 네가 노트의 흰 종이에 크메르어 글자를 써넣는 소리는 비닐하우스에 눈 내리는 소리와 닮았어. 눈이 내리지 않는 나라에서 생겨난 글자들이 눈 내리는 소리를 내며 흰 종이에 검게 내려앉고.
일기를 쓸 때 넌 날 신경 쓰지 않아. 일기장을 펼쳐 두고 부엌에 물을 가지러 가거나 욕실에 다녀오기도 하는 걸 보면 말이야. 일기장 속 크메르어 글자들은 미얀마인인 내게 풀 수 없는 암호나 마찬가지니까. - 36쪽, ‘국경’에서
우리가 일하는 농장이나 공장은 대개 딸기밭처럼 마을과 떨어진 들녘이나 버스가 거의 다니지 않는 외진 곳에 있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장님이 월세를 받고 임대하는 숙소에 살아. 숙소의 모양과 구조는 김밥천국의 김밥 종류만큼 다양해. 비닐하우스, 샌드위치 패널, 컨테이너, 공장 건물 위에 지은 가건물, 돈사나 축사 한구석, 시골 폐가를 대충 개조한 집, 양식장 물 위 바지선.
완나처럼 나도 한국 드라마 속 아파트 같은 숙소에서 살 거라는 기대를 품고 한국에 왔어. - 80쪽, ‘딸기 실존’에서
보파, 나는 뚜라에게 낙태권이라는 권리가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어. 그런 권리가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죄책감에서 놓여날 수 있다면 말이야.
낙태권까지 가기에 딸기 따는 여자애들인 우리가 가진 권리는 너무 적어. 나는 그것이 지구에서 너무 멀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해왕성이나 천왕성같이 여겨져. - 92쪽, ‘딸기 연애’에서
갈색 피부의 여자애들 안에서도 내 계급은 낮아. 동남아의 빈국 중 하나인 내 국가는 몇 년 사이에 최빈국이 됐어. 그 바람에 내 계급은 더 낮아졌어. 그런데 나보다 더 계급이 낮은 여자애들이 있어. 우리 딸기밭에도 있어. 보파 너. 불법체류 노동자. - 99쪽, ‘딸기 계급’에서
한국어 교재에는 ‘아름답다’가 없어. 그 이유는 딸기 따는 여자애들에게 아름다움이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겠지. ‘아름답다’를 아는 것보다 ‘단무지’를 아는 게 한국에서 살아가는 데 더 도움이 돼. (……) 단어 하나를 내 혀에서 강제 추방해야 한다면. 아름답다. 나는 캐리어에 한국어 교재 대신 밀폐 포장한 응아삐를 넣어 올 수도 있었어. - 112쪽, ‘접시저울’에서
보파, 지구와 비슷한 외계 행성이 발견됐대. 지구와 146광년 떨어진 그 행성은 딱 한 번 관측됐는데 쌍둥이라고 해도 될 만큼 지구와 닮았다고 해.
지구 어딘가에서는 인간이 인간을 파괴하고 있어.
그리고 지구 어딘가에서는 인간이 우주를 들여다보며 인간과 비슷한 존재를 찾고 있어. 친구가 되기
위해서. - 212쪽, ‘딸기 권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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